꿀벌과 천둥, 지금 읽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할 소설
- 문화/독서와 기록
- 2017. 9. 2. 07:30
온다 리쿠 장편 소설 '꿀벌과 천둥', 서점대상X나오키상 역사상 첫 동시 수상한 소설
책을 읽다 보면 '왜 나는 이제야 이 책을 만나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너무나 재미있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인 책이 그렇다. 오늘 대학 개강을 앞두고 개강 당일까지 읽은 온다 리쿠의 장편 소설 <꿀벌과 천둥>이 나에게 바로 그런 책이었다.
<꿀벌과 천둥>이라는 책을 알게 된 것은 블로그 구글 애드센스를 통해 뜬 광고 덕분이다. 블로그에 게재된 광고를 통해 작은 흥미를 품게 되었고, 인터넷 서점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올라와 있어 망설이다가 책을 구매했다. 인터넷 서점 베스트 셀러는 꼭 기대를 채워주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다 리쿠의 장편 소설 <꿀벌과 천둥>은 그 기대를 넘어서 온몸에 전율이 돋게 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읽는 내내 전율이 돋는 책이다.'라는 표현이 바로 이 소설을 위해 존재하는 표현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래서 도무지 지금 쓰는 글의 제목을 정하기 어려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꿀벌과 천둥>이라는 제목만으로 우리는 이 작품이 어떤 장르의 소설인지 쉽게 추측하기 어렵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소설 제목으로 사용된 '꿀벌과 천둥'은 소리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소재다. 꿀벌의 여리면서도 분명한 존재감이 있는 날개 소리, 보이지 않지만 웅장하게 퍼지는 천둥소리.
무언가 머리에서 번뜩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바로, 음악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음악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저녁 밤에 치킨과 맥주를 곁들여 보는 프로야구 시합에서 들리는 응원가, 무승부로 비겨 안타까운 한숨을 내쉰 월드컵 예선전의 응원가, 금요일 밤늦게 탄 지하철의 도착 음이 그렇다.
<꿀벌과 천둥>은 피아니스트들의 이야기다. 자유로운 한 명의 천재 피아니스트 소년을 만나 또 다른 천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개화하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특히, 작가 온다 리쿠가 표현한 피아노의 깊은 심연의 풍경은 소설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꿀벌과 천둥> 시작은 유지 폰 호프만이 사사한 가자마 진의 피아노 연주를 들은 심사위원들의 모습이다. 이때까지 들은 어떤 피아노 연주보다 파격적으로 살아있다는 생동감이 느껴진 그의 연주는 모든 사람을 동요시켰다. 어떤 사람은 홀이 떠나갈 듯한 갈채를 보냈고, 어떤 사람은 크게 격노하기도 했다.
가자마 진을 보는 상반된 이 시선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소설을 읽는 동안 음악을 전혀 듣지 않아도 마치 음악이 들리는 듯한, 음악 속에서 소설이 그리는 그림을 그려나가는 듯한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대학 개강을 맞이한 첫 번째 수업 시간 전에도 소설을 읽었는데, 수업을 내팽개치고 싶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꿀벌과 천둥>에서 주목받는 인물은 '가자마 진' 한 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꿀벌과 천둥>은 다양한 사람의 시점을 빌려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모습을 그린다.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하는 사람, 콩쿠르에 출전한 가족 혹은 친구를 응원하는 사람, 콩쿠르를 취재하는 사람 등.
덕분에 이야기는 굉장히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똑같은 하나의 장면을 사방에서 둘러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책을 읽은 장소는 대학교의 강의실, 지하철 안, 버스 안, 내 방 딱 이렇게 네 장소에 불과했음에도 나는 목이 아플 정도로 둘러봐야 하는 장대한 카네기 홀에서 모두를 보고 있는 듯했다.
<꿀벌과 천둥>을 통해서 피아니스트들은 음악의 신에게 사랑받는 천재가 어떤 것인지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책을 읽는 동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빠져드는 문체가 이런 거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도대체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소설의 문체에 빠지는 것도 잠시, <꿀벌과 천둥>을 통해 보는 피아노 연주와 그 연주를 듣는 관객과 피아니스트의 시선에서 나는 끝도 없는 세계를 보았다. 아마 이것은 내가 소설을 읽으면 곧잘 소설 속 세계에 빠져드는 탓이기도 하고, 조촐하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탓이기도 하리라.
소설에 '피아노는 천재 소년 소녀들만을 위한 게 아니니까.'라는 말이 있다. 딱 이 한 문장에서 나는 서툴러도 피아노를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피아노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소설 <꿀벌과 천둥>을 읽게 되면서 더욱 깊이 소설 속으로 빠져들지 않았을까?
한때 천재 소녀로 불렀다가 어머니의 사망 이후 피아노를 떠났던 에이덴 아야의 시점에서 나는 눈물을 훔쳤고, 자유분망한 가자마 진의 시점에서 음악은 자유로운 여행이라는 걸 깨달았고, 처음부터 갖고 있던 재능을 꽃피운 마시루의 시점에서 재능 있는 연주가의 끝없는 목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늦은 시기에도 피아노 앞에서 자신을 마주한 다카시마 아카시의 시점을 통해서 스물여덟의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한 내 모습을 보았다. 나는 콩쿠르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 욕심은 턱도 없는 욕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저 나는 내 방에서 홀로 연주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한 번은 피아노 콩쿠르 현장을 보고 싶었다. 분명히 어릴 적에 어머니 친구의 딸이 피아노 콩쿠르에 나간 적이 있어서 한번 딱 본 적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잊어버리고 말았을 기억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두 번째로 무대에 선 가자마 진은 이미 관객들의 열광적인 박수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종종걸음에 가까운 속도로 들어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얼른 의자에 앉앗다.
객석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가 곧바로 연주를 시작한다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연주는 바로 시작되었다.
객석 전체가 둥실 떠오르는 듯한 착각.
신기하다. 정말 그의 소리를 들은 순간, 세포가 숨을 쉬고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마사루는 전신으로 그 소리에 집중했다. 그것은 주위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슴 뭉클한 이 감각을 몸속에 붙잡아두고 싶다고 갈망하는 것이다.
드뷔시 연습곡, 제1곡.
역시나 대담한 선곡이다. 마사루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이 선곡이 잘 어울린다.
피아노 초심자 교본으로 유명한 '체르니에 의한'이라는 부제로 알 수 있듯 이 곳은 피아노를 막 시작한 아이들이 연상되는 어설프고 익살스러운 프레이즈로 시작한다. 하지만 '피아노 연습'은 서서 진화한다. 어색하고 불안했던 손가락은 확신에 찬 힘찬 터치로, 엉망진찬이었던 오른손과 왼손의 움직임은 역동적인 유니즌으로. 그리고 '피아노 연습'은 당당한 '피아노 연주'로 끝을 맺는다.
총천연색. 드뷔시가 강렬한 색채를 자랑한다. 마사루는 혀를 내둘렀다. (본문 388)
소박하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글을 쓰는 나는 이 장면에 포스트잇 한 장을 붙여 놓았다.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애니메이션 스토리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그 밑에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들은 음악이 있었다. 이야기와 음악이 만나 비로소 완성되는 예술을 나는 체험해보고 싶었다.
아니, 체험해보고 싶다고 말하기보다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게 나의 욕심이다. 음악을 통해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내가 보는 심상 풍경을 글로 옮기고 싶다. 상상만 해도 웃으면서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일은 욕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꿀벌과 천둥>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재능이라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은 기분이다. 나는 이러한 소설을 아무리 세월이 지나더라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을 통해 보는 피아노 콩쿠르 현장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무척이나 섬세했다. 콩쿠르 한 장면을 읽고 나면 마치 그곳에 있는 듯 목이 탔다.
소설을 읽는 동안 칠칠치 못한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이라도 전자 피아노 앞에서 연주하고 싶었고, 베껴쓰기를 해서라도 소설의 한 장면을 옮겨쓰고 싶었고, 내가 오늘 살아가는 이유는 분명히 책을 읽기 위해서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도무지 소설 속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꿀벌과 천둥>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음악의 세계와 콩쿠르를 준비하는 피아니스트의 세계로 안내한다. 비록 피아노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소설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우리는 문장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음악 세계를 여행하고, 주인공이 겪는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며 혼연일체가 될 수 있으니까.
'환상적이다'는 말로도 부족한 이 소설, <꿀벌과 천둥>을 아직 만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이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 선물이 될지, 재앙이 될지는 당신의 감상에 맡긴다. 총 693페이지의 장편 소설이지만, 책을 읽을수록 페이지가 줄어든다는 게 아쉬웠다.
진실로 한 사람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적다. 한 사람의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을 짧다.
보잘것없고 짧은 인생 속에서 피아노를 만났고, 피아노에 인생의 적잖은 시간을 들였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 자체로 얼마나 큰 기적일까? 매 순간, 소리 하나하나가 지금 우연히 같은 시대, 지금 이 시간에 만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기적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떨린다.
나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 겁내고 있다. 떨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못 견디게 기쁘다.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 못 견디게 애틋하다. (본문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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