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욤비,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 문화/독서와 기록
- 2014. 11. 9. 07:30
"한국에도 난민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이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국내 방송에서는 외국인의 모습이 점점 더 많이 보이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TV에 자주 나오기 시작하는 보일러 광고에도 어떤 이름 모르는 외국인이 나와서 함께 CF를 촬영할 정도이니 이 정도면 외국인에 대한 시선이 상당히 바뀌는 중요한 시기에 놓여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아는 것만큼 그렇게 녹녹지 않다. 또 부정적으로 본다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제발 긍정적으로 좀 세상을 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언제나 좋은 면만을 보려고 하지만, 결국 진짜 한국이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교의 눈물》에 등장했던 판사 천종호 판사도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잖아요.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지."이라는 말을 강하게 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크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겉만 보면서 '문제없지?' 같은 생각을 너무 쉽게 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한 노력이 출발점이다.
《비정상회담》 이후, 분명히 많은 사람이 주변의 외국인을 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졌을 거다. 그냥 무서운 외국인, 냄새 나는 외국인, 나와 다른 외국인이 아니라 좀 더 존중하면서 배려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전에도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이나 보도되었지만, 한국 사람들이 이만큼 외국인에 대한 관심을 가진 건 이례적이지 않을까?
내 이름은 욤비, ⓒ노지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냥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보면 '어, 외국인이네.' 딱 그런 느낌이었지, 그들의 문화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냥 단순하게 한국에서 일하는 불법 체류자 외국인이 아니면, 조금 있는 집의 외국인이 여행을 왔거나 유학을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정상회담》을 계기로 나는 겉만 보는 게 아니라 좀 더 그 속을, 문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으로 위에서 볼 수 있는 《내 이름은 욤비》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은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한 욤비 씨의 치열했던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는 책이었다. 여기서 난민이라는 단어가 조금 생소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난민에 대한 간단히 사전적인 정의를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난민이란 간단히 말해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 보호해 주지 않는 처지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난민들이 불쌍하고 마냥 도움을 줘야 하는 사람들인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인 문제든 종교적인 문제든, 아니면 성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든, 이들 난민은 자유를 제약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맞서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용감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① 난민이란?
전통적 의미의 난민을 정의할 때는 1951년 유엔에서 채택된 "난민의지위에관한협약(난민협약)"을 거론합니다. 이 협약은 난민의 정의와 권리를 규정하고 있기에 난민 여부를 판정하고 그들의 법적인 지위와 권리를 따질 때 가장 권위 있는 국제법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1년 1월 1일 이전에 발생한 사건의 결과로서, 또한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및 이들 사건의 결과로서 상주 국가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종전의 상주 국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종전의 상주 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p131)
이런 난민은 우리나라에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아마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난민 신청이 매해 들어오고, 난민으로 거주하는 사람도 있고, 난민의 개념과 유사한 유사 난민도 거주하고 있다. 가장 쉬운 예는 북한을 탈출해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난민이라는 단어는 낯선 단어라고 생각한다. 책 《내 이름은 욤비》를 읽어보면, 이 난민이라는 것에 대해 정말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볼 수 있는 한국의 어떤 제도적 문제와 함께 여전히 유엔의 권고를 받고 있음에도 수정되지 않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만큼 이 책은 읽으면서 배울 수 있는 유익한 책이었다.
"한국의 다문화 교육에도 문제가 있어요. 오로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한국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가르치는 게 다문화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출신 국가의 문화를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우리 아이들만의 문제만이 아니에요. 한국이 먼저 바뀌어야 해요." (p296)
성공회대에서 수업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수업 전에 잠깐 요기를 할 생각으로 학생 식당으로 가는데 누군가 "욤비 형" 하고 불렀다. 켄이라는 버마 친구였다.
"욤비 형, 그 얘기 들었어요? 보노짓 후세인 교수 말이야."
보노짓 후세인 교수는 인도 출신으로, 성공회대 연구 교수였다. 우리 과에 인도 출신인 오닐이나 바라쉬 같은 친구가 있어 몇 차례 함께 어울린 적이 있다.
"후세인 교수가 왜? 무슨 일이야?"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켄 때문에 나도 잔뜩 긴장을 햇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큰일은 큰일이었다.
어느 날 후세인 교수가 한국인 활동가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는 나누는데 앞자리에 탄 승객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더러운 놈, 냄새 풍기지 말고 너네 나라로 돌아가!" 하고 소리를 지르더란다. 후세인 교수뿐 아니라 옆자리에 탄 한국인 여성 활동가에게도 외국인과 같이 다니니 좋냐는 둥, 어디 남자가 없어 아랍 남자랑 같이 다니냐는 둥,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했다. 실랑이가 이어졌다. 남자의 목소리는 더 커졌고 결국 경찰서까지 갔다.
ⓒ시민사회
더 황당한 일은 경찰에서 벌어졌다. 경찰은 사건 당사자인 세 사람 중 피해자인 후세인 교수와 한국인 활동가의 말보다 버스 승객의 말을 더 믿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후세인 교수에게 다가가 신분증을 요구하더니 "네가 교수야?" 하는 식으로 반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경찰서에서 기다리는 동안 사내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모욕적인 언사를 계속 쏟아 부어도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조사는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가해자는 일찍이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그날 수업에 모인 학생들은 후세인 교수가 겪은 일을 듣고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분노했다. 일본에서 온 친구는 좀 다른 처지였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후세인 교수와 같은 일을 비일비재하게 당하는 터였다.
"그날 버스에 탄 승객들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는 게 한국 사회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
"맞아. 한두 명의 인종주의자는 어느 나라에든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종차별은 '범죄'라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거든.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만약 그 일이 한국 사람들 사이에 일어났다고 해 봐. 그럼 당장에 너도나도 참견해서 싸움을 말리려고 했을걸?"
학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나는 후세인 교수 사건에서 두 가지가 놀라웠다. 하나는 후세인 교수에게 시비를 건 사람이 번듯한 양복을 입은 멀쩡하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는 사실이었다. 8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인종차별을 많이 겪었지만 대부분은 멋모르는 시골 사람이거나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이었지, 젊은 사람이 그렇게 대놓고 모욕을 준 적은 없었다. 두 번째는 경찰의 태도였다. 후세인 교수는 경찰의 공정하지 못한 태도를 지적했다. 단순히 존댓말을 쓰고 안 쓰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후세인 교수는 자기가 피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범죄자' 혹은 '불법 체류자'로 취급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인 사이에 외국인 대한 혐오가 세대를 넘어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 다른 학생들도 동의했다.
"한국은 인종 문제에 있어선 더 후퇴하고 있는 것 같아요." (p300)
내가 난민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난민과 함께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문제점은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윗글에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뭐, 위화감이라는 단어보다 외국인 차별과 그 사이에 있는 인종 차별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에 블로그에 작성했던 '차별을 가르치는 못난 어른들'이라는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나라는 서로 같은 한국인임에도 여러 가지 요소로 나누어 차별한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몰상식한 일부 사람은 이런 차별로 사람들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만약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 이런 차별을 받는다면 어떨까?
분명히 그 수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을 넘을 것이다. 우리는 해외에서 한국인이라고 차별을 받는 것을 싫어하지만, 많은 사람이 한국에서는 다른 외국인을 그것과 똑같은 방식, 아니, 오히려 더 심하게 차별하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읽을 수 있는 300쪽의 이야기는 뉴스로도 보도되었던 사건이지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 이야기다.
나도 이 책 《내 이름은 욤비》를 읽기 전까지 그 사건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시에 기사를 읽으면서 '빌어먹을, 한국 시민은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좀 더 성숙한 시민이 될 수 있는 거야?' 같은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역시 사람은 한때 관심을 가지고 분노하더라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시들시들해지면서 현재를 바꾸지 못하는 생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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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 이름은 욤비》에서는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는다. 그냥 한국에 난민으로 들어와서 난민 신청을 하고,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난민 신청 승인을 위해 법적인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욤비 씨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야기에는 나쁜 한국인도 등장하고, 좋은 한국인도 등장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인의 모습이 말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 좋은 한국인의 모습을 읽으면서 정말 감동을 하였었다. (뿌듯함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좋은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제도와 운영은 여전히 허점투성이라 고칠 것이 많다는 사실에 많은 아쉬움이 묻어 나오기도 했다. 아마 이 책 《내 이름은 욤비》를 읽는 사람은 꽤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걸어 잠근 빗장을 열고, 문을 열어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단일민족이라면서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라 좀 더 넓은 시야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한국을 말하는 외국 교수가 쓴 여러 경제학 도서가 '한국이 다음 단계로 발돋움 하기 위해서는 여성 인재의 활용과 외국인 인재의 활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거기에 있다.
음,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다. 이 이외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책 《내 이름은 욤비》를 통해 직접 읽어보기를 바란다. 분명, 여러 가지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정상회담》을 통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이야기처럼, 나부터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우리 주변의 외국인과 외국 문화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자. 그게 열린 한국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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