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학생과 교사 사이에는 은밀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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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개념 10대와 무개념 성인 사이에 숨겨진 우리가 외면한 불편한 진실


 우리가 보는 뉴스에서는 10대 청소년의 범죄 행위와 무개념 선생님이 벌인 만행이 안 되는 일이 보도된다. 학생에게 살충제를 뿌린 교사의 만행, 교사를 폭행한 한 초등학생, 길거리 흡연을 지적한 40대 아저씨를 집단 구타해 사망케 한 10대들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다.


 도저히 10대 청소년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막무가내의 일이 터지면, 마치 반박기사라도 되는 듯 교사의 자질을 의심하게 하는 만행도 함께 보도된다. 이쯤 되면 학생의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과 교사의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이 은밀하게 싸움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런 무개념 10대 학생과 무개념 선생님의 일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는 최대의 난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절대 해결이 불가능한 빈부격차에 인한 갈등과 기아 문제, 종교 갈등 등 여러 가지 문제와 함께 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폴인러브


 그 질문에는 단지 딱 하나의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 '폭력 학생(무개념 10대)이 자라서 폭력 교사(무개념 교사 혹은 어른)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불편한 진실 말이다. 결국, 이 모든 학교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연쇄 문제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아, 그렇군. 수긍이 간다'며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리에 부딪힐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불편한 진실이 가장 정확한 이유이지 않을까.


 단지 이기심만을 강요하며 인간성을 배제한 채, 오직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은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미 그 과정은 우리 학교와 사회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스템에서 성인군자가 나타나길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인간성을 배제한 채, 오직 결과만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지닌 아이들이 '실패'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어른은 모른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 아이가 얼마나 치밀하게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의 아픔을 즐기는 지 어른은 모른다.


 그런 잔인한 10대가 자신의 잘못을 한 번도 제대로 뉘우치지 않은 채, 누구에게도 지적을 받지 않은 채 어른이 된다. 더욱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항상 그 두 눈과 두 귀는 '넌 성적 우수생이니까 좋은 대학만 가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사이비 종교 같은 믿음에 사로잡힌 채 어른이 된다.


 그런 학생이 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돌아오고, 사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변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폭력 학생이 줄어들고, 폭력 교사가 줄어들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시스템 속에서 굴러가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우리가 단지 《학교의 눈물》 같은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그런 폭력은 우리와 먼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 아이의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가 지금 같은 실수를 하는 어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거다.


 내가 최근에 읽고 있는 《학교의 슬픔》이라는 책은 어떻게 그 잘못된 가치관 속에서 무너지고 있는 학생과 마주해야 하는지, 우리 어른(선생님과 부모님)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아주 상세히 말하고 있다. 책에서 읽을 수 있었던 한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패거리 짓기를 오로지 주변적인 현상으로만 치부하는 모든 이에게 말하겠다. 당신들 말이 맞다. 실업이 그렇고, 소외된 자들의 결집이 그렇고, 인종적 결속이 그렇고, 낙인의 횡포와 편부모 가정이 그렇고, 암거래 경제의 발달과 모든 종류의 밀매가 그렇다. 맞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 하나만큼은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모두가 이해하는데 혼자만 이해하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학생의 고독과 수치만은.

우리만이 그를 그 감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일을 위해 양성되었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나를 구해냈던- 그리고 나를 교사로 만들었던- 선생님들은 그 일을 위해 양성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무능한 학교생활의 기원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았다. 원인을 찾느라 시간을 허바하지도 않았거니와 나에게 설교를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위기에 빠진 청소년을 마주한 어른이었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몸은 던졌다. 그들은 나를 놓쳤다. 하지만 매일같이 다시 몸을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거기서 건져냈다. 나와 더불어 다른 많은 아이도 건져냈다. 말 그대로 우리를 낚아올린 것이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 (학교의 슬픔, p 47)



 과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학교에서 저런 일이 가능한 선생님은 몇 명이나 있을까. 다행스러운 건 그런 선생님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부모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과 선생님보다 평범히 사는 학생과 선생님이 더 많은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행스러운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괴롭힘으로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심어주며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10대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을 태연히 저지르는 10대는 자라서도 그런 성인이 되어버린다.


 그게 학교에서 아이를 엉망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이든, 정치계에서 사리사욕만 채우는 정치가든, 기업을 운영하며 약자의 피를 쪽쪽 빠는 기업가든, 직장에서 일하며 학교와 마찬가지로 은밀한 괴롭힘을 하는 직장인이든, 군대에서 보라는 듯이 총을 쏠 수밖에 없게 한 선임이든 말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자신과 같은 이기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는 동료와 함께 가짜 모범생의 탈을 쓴 채 오늘도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괴롭힘을 지속하고 있을 거다. 문득, 이 이야기를 하자니 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남긴 한 녀석이 떠오른다.


 그 녀석은 중학교 시절에 같은 반이었던 1년은 정말 지독하게, 다른 반이었던 1년은 우회적으로 괴롭혔던 녀석이다. 성적이 상위권이라 철저한 담임 선생님의 보호를 받았던 녀석의 괴롭힘은 주변의 힘으로 절대 드러나지 않았고, 절대 잘못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오직 괴롭힘을 당한 나의 잘못이었다. 그 녀석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마 아직 그 본질을 들키지 않기 위한 착한 사람의 가면을 쓰고, 오늘도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누군가를 괴롭히며 누구보다도 더 악랄하게 이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관을 제 자식에게도 물려주며 대를 거듭할 것이다. 그게 지금 우리가 직면한 사회 문제다.


 폭력 학생이 폭력 교사가 되는 일, 무개념 10대가 무개념 성인이 되는 일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은밀한 관계로 이어져 있다. 단지 '그렇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라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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