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 더도 덜도 없는 삶의 회고록
- 문화/독서와 기록
- 2017. 8. 21. 07:30
미국 백인 빈곤층에서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기까지의 이야기
오늘 우리 사회에는 주말을 반납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고깃집을 방문하면 열심히 불판을 나르고 있는 아르바이트생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찬을 덜거나 설거지를 하고 있을 청년, 중년층으로 이루어져 있을 사람들이 그렇다. 고깃집만 아니라 소비가 일어나는 곳 어디라도 똑같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주말에 다른 사람들을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라고 말한다. 빈곤한 사람들은 주말에 자신의 시간을 가지거나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이 먹고살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술과 담배를 해도 어쩔 수가 없는 삶이다.
다행히 20대인 나는 주말에 알바를 하지 않더라도 어머니 덕분에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단 한 번도 우리 집이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계층의 표본에서 극심한 빈곤층이 아님은 분명했다. 어쩌면 행운이라고 해도 좋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이 평화로운 건 아니었다. 아니, 현재형으로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은 몇 번이나 조기 붕괴할 뻔한 파탄의 위기를 맞았고, 최종적으로 부모님이 서로 함께 살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 선택지 덕분에 나는 지금 글을 쓸 수 있다.
아마 나만 이런 삶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물어보기만 하면 누구나 말할 이름있는 재벌의 집안이 아닌 평범한 집안은 모두 크고 작은 풍파를 겪기 마련이다. 그 풍파는 한 지역을 초월하고, 한 나라를 초월해 어디든 닥치는 법이다. 그렇기에 희로애락을 표현한 예술은 모두 닮았다.
오늘 읽은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은 우리가 일요일 아침에 추신수의 홈런 소식을 들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인물의 이야기다. 저자는 백인 빈곤층 가정에서 태어난 인물로, 보통 미국 상류계층이 산다고 생각하는 삶과 정반대의 삶에서 탈출해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 J.D 밴스였다.
글을 쓰기 전에 책 제목의 뜻이 궁금해서 구글 검색을 해보니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는 '촌뜨기의 슬픈 노래'로 번역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책 제목이 내포한 뜻이 와닿았다. <힐빌리의 노래>는 '촌뜨기의 슬픈 노래'라는 뜻과 너무나 어울리는 치열하고도 슬픈 투쟁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저자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달동네에서 자란 인물이다. 우리는 종종 달동네의 이야기를 사진 찍기 좋은 장소라거나 소박한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사는 곳이라고만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빈곤층이 모이는 달동네는 그곳에서만 있는 보이지 않는 상처가 깊은 곳이다.
하물며 총기가 허용된 미국의 위험도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라도 미국에서는 살아남기 힘든 곳이다. 백인 하위 계층이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보도가 곳곳에서 나왔지만, 실제 투표를 한 사람들의 의중은 모른다. 우리 한국에서 대구와 같은 상황이다.
저자이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굉장히 놀라게 된다. 무엇보다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살아왔던, 아니, 지금도 살아오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집도 시골 촌에서 시작했으니까.
저자이자 주인공의 가족은 사실 평범한 가정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책에서 '세 명의 아버지 후보와 시간을 가졌던' 문장을 읽으면서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피가 섞이지 않은 형제자매들의 이야기와, 그런데도 늘 곁에 있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다.
<힐빌리의 노래>는 초등학교에 다닐 시절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지그에 도달하는 과정의 방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짧은 단편 소설이나 에세이를 좋아하는 나는 집중력을 몇 번이나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책을 빠르게 읽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저자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도 비참한 미래를 앞둔 아이들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중퇴를 가까스로 면했고, 주변 사람들을 향한 끓어오르는 분로를 이기지 못하고 망가지기 직전의 지경에까지 갔었다. 최근에 알게 된 사람들은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간판과 직업만 보고서 내가 무슨 천재라도 되는 줄 안다.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만이 지금의 내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전부 헛소리다. 타고난 재능 따위를 운운할 수도 없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몇몇 사람이 구해주기 전까지 나는 시궁창 같은 삶에서 허덕이며 살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실제로 경험한 인생이며 이 책을 쓴 까닭이다. 나는 자포자기 직전까지 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어쩌다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되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본문 9
다른 책과 달리 유달리 긴 프롤로그는 저자가 책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혹시 <힐빌리의 노래>를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책의 프롤로그를 꼭 읽은 이후 본문을 읽은 이후에 다시 한번 더 마지막으로 프롤로그를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책의 에필로그를 읽어도 정리되지 않는 <힐빌리의 노래> 본문의 마지막 마침표를 프롤로그를 통해서 마침내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미국 백인 노동자 계층의 삶을 다루고 있고, 어쩌면 오늘 우리 한국에서 감춘 빈곤층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는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단순히 일하는 것만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어떤 정치가를 욕하는 일도 그렇고, 끼리끼리 어울리는 집단에 소속되는 일도 그렇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일도 그렇다.
가족, 이웃, 친구 등 우리의 삶은 주변 사람의 많은 영향을 받는다. <힐빌리의 노래>는 주인공이 어떻게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탈출이라고 말하는 건 조금 책의 주제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탈출이라는 말보다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는지'가 알맞다.
일요일 오후, 홀로 집에서 한적하게 채널 애니플러스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나는 요즘 말로 하면 한가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평온한 삶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싸움이 있었고, 지금도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나름 애를 쓰고 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면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과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겪은 어려움이 쉬웠다고 말하고 싶지 않고, 지금 누리는 삶이 쉽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어디까지 나의 시점에서 내가 겪은 시간은 평생 사라지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최대한 버티면서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다. 막연해 보이는 꿈을 좇으며 오늘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내가 삶을 통해서 배운 최대의 교훈이었다.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 또한 자신의 삶과 주변의 삶을 통해 같은 주제를 전하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우연히 치열한 삶의 기록이 담긴 <힐빌리의 노래>를 읽게 된다면, 어떤 감상을 들려줄지 무척 궁금하다. 하나의 이야기라도 책을 읽는 독자에 따라 그 이야기는 다른 형태를 띠게 되는 법이니까. 어쩌면 이 책은 불평등이 커지는 이 시점에 꼭 읽어야 할 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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