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의 성추행? 누가 누구를 가르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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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관계를 저속하게 가르치는 권위주의 사회의 슬픈 이야기


 요즘, 뉴스의 사회 카테고리에서는 '성추행'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일이 급속히 증가한 것 같다. 몇 달 전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이라는 유명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에서 한 직원이 '정규직'을 빌미로 인턴을 성추행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아프니까 청춘은 무슨, 아프면 환자지'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문제는 그게 아니다. 성추행 피해자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채,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성추행 가해자는 다시 복직이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기도 했었는데, 이 소식을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되면서 참 기가 막혔다.


 아무리 이 나라가 '가해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이미 여기저기 작은 사회의 일부분에서도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더 챙겨지는 모습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며칠 전에는 우리나라 수험생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서울 대학교의 한 교수가 학생들을 상대로 2004년부터 10년에 걸쳐서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서울대학교'가 어떤 학교인가? 우리나라의 많은 수험생이 꿈꾸는 이상적인 대학교가 아닌가? 내가 고등학교에 다녔던 시절에는 학교의 소풍을 서울대학교로 갔을 정도로 서울대학교는 그런 좋은 학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서울대학교의 의견은 사회에서도 크게 반영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런데 그 대학교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대학교가 말세기는 말세다.)


ⓒ노컷뉴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이라며 깜짝 놀랄 사실은 아니다. 권위주의 문화가 강하게 작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활동하는 정치권에서도 성추행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데, 정치인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권위주의에 물든 교단에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니까.


 솔직히 갑과 을의 관계로 나누어지고, 권위주의가 강하게 작용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부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런 부패를 막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럼에도 그런 노력을 비웃을 정도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부패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런 부패가 드러나더라도 힘을 가진 그들은 그것을 덮어버리기 일쑤다.


 앞에서 언급한 어느 출판사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마 대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건은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망신시킨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이 아닐까 싶다. 윤창중 전 대변인은 그 사건을 계기로 경질이 되었지만, 그 사건 자체는 흐지부지하게 끝이 나면서 '역시 가진 자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가해자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쉽게 처벌을 받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갑과 을의 관계를 이용해서 을의 처지에 있는 약자들을 정말 악랄하게 이용한다.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여성 인턴(계약직)에게 성희롱 발언과 성추행을 하는 등의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많다. 장안의 큰 화제는 연예인 기획사 사장이 15살 여중생을 임신하게 한 일이지 않을까 싶다.


ⓒJTBC 뉴스룸


 이 정도의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도 처벌이 미미한 수준에 그치는 우리나라를 보면 '성진국'이라고 불리는 일본에 못지않은 것 같다. 뭐, 이는 가부장적 사회를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권위주의에 물든 세력이 높은 직위에서 갑의 위치를 장악하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제 식구 감싸기와 사건의 은폐, 축소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으니까.


 특히 '성추행'과 '성폭행' 등의 사건은 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 미국이나 유럽 등의 나라에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의 신상을 선 공개하고 피해자의 신상을 철저히 비밀리에 부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가해자의 신상은 보호하면서 피해자의 신상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피해자가 소송을 이어가면서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를 상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 더욱이 성추행이 이루어지는 집단 내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피해자들은 갑의 위치에 있는 가해자보다 여러 여건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명예 실추'로 근무하던 곳에서 해직을 당하고, 남겨진 상처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회복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한데, 그런 게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일명 '밀양집단성폭행사건'이다. 이 사건은 2004년 12월경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끼 시작하여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집단성폭력사건의 처리 빵식에 관하여 많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피해자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이혼하고 집을 나간 후 어머니 대신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악몽 같은 생활을 하던 피해자는 우연한 기회에 당시 열여덟 살인 밀양 지역 고등학생인 박 군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박 군은 피해자를 불러내 쇠파이프 등으로 떄린 뒤 여인숙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선후배 열두 명과 함께 집단성폭행을 자행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한번에 적게는 일곱 명에서 많게는 열 명씩 짝을 이루어 피해자를 여관과 자취방으로 끌고 다니며 단체로 유린했고, 성폭행당한는 장면을 휴대전화와 캠코더 등으로 촬영하여 피해사실을 신고하면 인터넷에 사진과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 …(중략)


그런데 피해 사실을 신고한 이후 피해자는 정당한 보호를 받고 안정을 되찾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언론이나 인터넷에 피해사실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신상과 사생활이 공개되는 등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후유증으로 피해자는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 장애를 겪게 되어 정신과 폐쇄 병동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고, 그 후 자실 시도도 빈번하게 하였다. 서울로 이사해 전학을 시도했지만 성폭행 피해자라는 이유로 거부 당하는 바람에 10여 곳의 학교를 돌아다닌 뒤에야 간신히 전학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끄러나 학교에 겨우 마음을 붙이고 있을 무렵 한 가해자 부모가 아들의 처벌 완화를 위한 탄원서를 써달라며 교실로 무작정 찾아오는 바람에 성폭행 피해자란 사실이 알려져 그 학교마저 그만두고 말았다. 피해자는 아직도 지속적인 자살충동 등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속에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밀양 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집단성폭력사건을 처리할 때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절실하다. 피해자가 입은 상처는 가해자들에게 대한 엄벌만으로는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p83,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성범죄는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고, 성 경험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부터 성추행을 하는데,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말인가? 어떤 정치인은 "거기에 아름다운 꽃이 있으면 향기를 맡고 싶은 게 본능이다."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 마땅히 그 본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은 건 시정잡배나 다름없다.


 성범죄 가해자들의 처벌 수위와 기사를 보면서 네티즌 사이에서는 '그냥 강간 한 번 해도 집행유예 받을 거면, 그냥 해도 되겠네.'이라는 노골적으로 형량을 비웃는 댓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일이 한 순간의 실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권위'는 약자 앞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강자 앞에서 움츠리지 않고 자신의 정의를 바르게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그런 것을 군자의 자세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치인과 기득권에서 갑 행세를 하는 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장과 정규 직원은 소인이 많은 것 같다. 그런 소인의 손에 무거운 무게의 힘이 있으니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로 돌아가는 것이다.


 정말, 언제쯤 우리나라에서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존중받을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가해자의 인권도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사과를 받을 수 있으려면 피해자를 우선으로 배려해줄 수 있는 제도의 안착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더 약해지니 가해자는 반성도 하지 않은 채, 더 기세등등해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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