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다카시 니체의 자존감 수업 후기
오늘날 우리는 SNS 시대를 살아가면서 성공할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손에 넣기도 하지만, 누구나 다 이용하는 SNS를 통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면서 깊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SNS 영상을 접하면서 자란 10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현재 2030세대, 나아가서 4050세대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항상 남들만큼만 사는 것을 목표로 살아왔다. 남들만큼 좋은 옷을 입고, 남들만큼 좋은 음식을 먹고, 남들만큼 좋은 곳에서 살기 위해서 과거에 열심히 경쟁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열심히 경쟁을 하고 있다. 물론, 경쟁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경쟁은 나를 더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발판이다.
문제는 그 경쟁을 하면서 집중해야 할 상대는 어제의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타인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로 우리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자 한다. 오늘날 SNS 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짜 뉴스와 악성 댓글이 대표적인 사례다.
어젯밤에 읽기 시작해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더 읽은 사이토 다카시의 <니체의 자존감 수업>의 한 페이지를 본다면 위의 글을 읽어볼 수 있다. '경시하는 한 증오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위라고 인정할 때 비로소 증오한다.(니체, 선악의 저편)'이라는 글은 읽으면서 무심코 소름이 돋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SNS 콘텐츠를 통해 유명해진 사람들에게 악성 댓글을 다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이 커다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나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면 나보다 외모도 못해 보이는 사람이 나보다 잘 나가니까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가 없었고, 어쩌다 기회가 생겼을 뿐이다.
과거 곽튜브가 학교 폭력 옹호 사건으로 커다란 질타를 받았던 경우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곽튜브도 절대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 더 큰 비판을 받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만큼 일반 대중은 '곽튜브'라는 인물에 대해 나보다 위라고 스스로 인정했기에 증오한 것이다.
<니체의 자존감 수업>의 사이토 다카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은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일은 없는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특출 나게 뛰어난 사람에게도 질투심은 잘 생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그 사람과 겨뤄봐야겠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고, 따라서 미워하는 마음으로 번지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과 비슷하거나 아주 조금 뛰어난 사람, 다시 말해 조금만 열심히 하면 어깨를 견줄 수 있을 것 같은 상대입니다. 질투를 느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보다 좋은 평가를 받거나 좋은 대우를 받으면 '왜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어야 하지?' 하고 미움이 생깁니다.
니체가 극복해야만 한다고 말한 질투는 선악, 우열, 미추 등의 가치관에서 생기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세우지 못하고, 누군가와 또는 무언가와 비교해 우열을 가리려고 하니 질투심이 생긴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질투심이 무서운 까닭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독침을 겨누기 때문이지요. (본문 134)
질투심이라는 건 나보다 아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품는 마음이 아니다. 우리 평범한 남자들이 차은우에게 질투심을 품지 않는 건 그가 하늘 아래에서 견줄 수 없는 외모를 가진 인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튜브에게 질투심을 품은 건 나와 비슷하거나 아주 조금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고작 그런 사람에게 질투심을 품을 리가 없다고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대중들이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은 윤석열과 김건희 같은 공공의 적으로 찍힌 정치인들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하지만 자신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특히, 개인 SNS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자주 그런 경험을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그런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나를 망치는 사람이 되기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자존감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니체의 자존감 수업>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는 우리가 니체의 말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 어느 때보다 자존감이 낮아지기 쉬운 오늘날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자존감 수업>의 첫 장에서 읽어볼 수 있는 니체의 말은 자존감을 확립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이다. 첫 장의 첫 페이지의 소제목으로 적힌 니체의 말은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라는 말로, 이 말은 이 책의 핵심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울만 아니라 스마트폰 카메라와 SNS 채널에 업로드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쉽게 외모 콤플렉스에 걸린다. 차은우 같은 연예인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쳐도 SNS에서 볼 수 있는 나처럼 평범히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의 외모와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거다.
그런 사람들의 괴로움에서 상품성을 발견한 사람들이 제작한 것이 자신의 모습을 가공해 보여주는 AI 프로필 사진이다. AI 프로필 사진의 붐으로 인해 거울로 보는 자신의 모습과 달리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운 AI 프로필 사진을 자신이라고 믿는 현상까지 생겨났다. 이런 게 옳은 현상일까?
<니체의 자존감 수업> 사이토 다카시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술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은 싫어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영역으로 들어가기 쉬운 면이 있지요. 이처럼 의존심이 감해지면 한 인간으로서 자립해 살아갈 힘이 약해집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술을 익히기 전에 먼저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본문 47)
오늘날 종종 볼 수 있는 데이트 폭력은 연인으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것을 계기로 발발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아, 내가 부족하구나. 나는 어떻게 더 나은 사람 되어야 하지?'라며 수긍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고, 격노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고 질투심이 큰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해 자존감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통해서 채우고 있었지만, 그 사람이 나를 부정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당한 것 같아 분노를 참지 못한 것이다. 나처럼 연애를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도 그런 두려움이 커서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자세한 건 여러분이 직접 고민해 보길 바란다. <일류의 조건>으로 유명한 사이토 다카시의 <니체의 자존감 수업>은 단순히 니체의 말을 옮겨 놓은 게 아니라 니체의 말을 통해 나를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나처럼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읽은 이 말을 남긴다.
그대는 노예인가?
노예라면 그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대는 전제자인가?
전제자라면 그대는 친구를 가질 수 없다.
_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친구로 삼고 싶은 사람은 노예적 정신, 전제자적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노예적 정신, 전제자적 정신이 있다면 니체가 말하는 친구가 되기 힘들 것입니다. 니체의 말을 하나의 계기로 삼아 친구에게 원하는 자질, 친구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친구 관계를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본문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