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력 학원과 테스트는 창의적 인재를 만들 수 있을까
틀에 박힌 생각을 강요하면서 틀에 박히지 않기를 바라는 이상한 어른들
지난주에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추사랑 편을 보다가 추성훈이 아이들에게 "뭐가 되고 싶어요?"이라는 질문에 "저는 로봇이 되고 싶어요!"이라고 대답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어른들은 그냥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짓겠지만, 그때 아이는 분명히 진지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그런 모습과 생각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창의적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뭐가 되고 싶어요? 꿈이 뭐에요?"이라는 질문에 "저는 공무원이 되고 싶어요."이라는 획일적인 대답을 하는 것보다 "로봇이 되고 싶어요."이라는 질문이 더 개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힌트가 아닐까?
많은 어른이 아이들의 창의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음악 학원과 미술 학원에 보낸다. 그리고 때때로 책을 읽어주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도록 해준다. 하지만 조금만 더 아이가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 창의력이 아니라 일단 먼저 시험 문제의 정답을 맞히기 위한 암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점점 창의력을 잃어버리고, 틀에 박힌 사고와 환경 속에서 점점 새로운 생각을 할 기회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과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창의력이 아니라 암기력이 전부라서 '창의'는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이다.
강요하는 건 막는 길, ⓒ비정상회담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애초부터 창의력과 관련한 수업은 배제하고,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 혹은 시험 성적을 높이기 위한 제도만 안착시킨 우리 사회가 말하는 창의적인 인재는 도대체 어떤 인재인 걸까? 그냥 상사의 말을 잘 듣는 인재가 아닐까?
저녁에 밥을 먹다가 <비정상회담> 재방송을 보았는데, 때마침 그때 그 방송은 '창의력'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하상욱 씨가 나와 '창의력이 없어 고민하는 나, 비정상인가요?'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토론은 지금도 창의력을 위해 바보 같은 일을 벌이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창의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해보라고 말하지만, 막상 기본적이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는 생각은 하지 못하게 한다. 앞이 꽉 막힌 어른은 아이의 열린 생각을 존중하지 못할 때가 많고, 바보 같은 질문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면서 아예 무시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소해 보이는 그런 행동 하나가 모두 창의력을 없애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창의력을 기르는 방법 중 가장 먼저 실천이 되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아무리 바보 같은 생각이라도 존중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 이후에 그런 생각을 사람들 앞에 말하는 게 어렵게 되니까.
존중이 먼저다, ⓒ비정상회담
우리 한국 사회에서 '질문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비정상회담>의 전현무가 말한 것처럼 '질문하지 마. 시험에 안 나온다. 진도 빼야 해.'이라고 말하는 선생님이 있기도 했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것이 바보처럼 여겨지는 사회적 풍토가 질문을 못 하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부 선생님이 질문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한다고 하지만, 이미 틀에 박힌 교육에 지나치게 숙달되어버린 아이들은 질문에 별 관심이 없다. 그냥 시험 점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고, 학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출제한 범위를 알고 싶을 뿐이다. 괜히 쓸데없이 질문을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
며칠 전에 한 학교에서 전교 20등까지 먼저 밥을 먹게 해주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이런 우리 학교의 모습이 차별을 낳고, 폭력을 낳고, 창의력을 죽이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왜 아이들이 잔인해지고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는지 모르는데, 그건 바로 저런 제도를 만든 탓이다.
저렇게 어른이 나서서 차별을 만드는데, 어찌 아이들 사이에서 서로 위화감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선생님이 나서 차별을 통해 폭력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만들고, 부모가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가 우리 사회인데, 어찌 학교 폭력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비정상이 정상인 한국, ⓒ비정상회담
그러면서도 창의력을 요구하는 것은 끝을 모르는 어른의 욕심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이라는 주장이 판치는 학교와 가정에서 아이는 창의적인 발상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도대체 뭐가 문제지?'이라는 질문도 못 하는 것이다.
내가 창의력이 없는 이유는 자유로운 발상에서 나온 의견을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질문을 하더라도 대답해주지 않은 탓인데, 그 원인을 우리는 '창의적 교육의 부재'에서 찾는다. 뭐, 이 말도 일부 일리는 있다. 아이들의 체육 시간, 미술 시간, 특별 활동 시간을 빼앗은 것은 어른들이었으니까.
지금에서야 다시 체육 시간을 되돌려주는 노력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리 아이들이 공부만 해야 하는 책상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다. 아마 진상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1시간 동안 수학 공식이 아니라 1시간 동안 자유롭게 아무 그림이나 그리는 수업을 한다면, 노발대발하지 않을까?
딱 우리 현실이 그렇다. <비정상회담>에서 들은 노르웨이나 독일의 수업은 우리나라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입시 교육 열풍이 큰 일본에서도 부활동을 권유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우리는 오직 '공부' 하나만 강조하니 점점 앞이 꽉 막혀버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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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교육부가 정말 창의적인 인재를 원한다면, 지금의 제도를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금 가장 큰 논란이 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반드시 시행되지 않아야 하는 제도다. 거꾸로 가는 역발상이 창의적일지 몰라도, 이런 획일화 교육에 앞장서서는 결코 '창조'를 말할 수가 없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다. 한국은 이런 분위기가 정말 강하다. 단순히 초등학교, 중학교의 문제가 아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나아가서 직장 내에서도 똑같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질문을 잘하지 못한다. 질문을 하는 것은 모난 돌이 되는 것이고, 괜히 나 혼자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른이 되어서 어떤 포럼이나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질문하세요'이라는 시간이 올라오면, 당당히 손을 들고 질문하지 못했었다. 이런 습관을 고치고, 조금 더 자신 있게 먼저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제야 겨우 창의적 발상에 발을 디딘 것이다.
줄 세우기, 차별, 논란, 획일화. 이런 단어는 우리 한국의 교육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틀을 벗어난 생각을 할 수 있는 인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창의력 학원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창의적 발상은 바로 일상 속의 여유와 자유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