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조용한 문체로 오감을 상상케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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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책을 읽으면서 오감의 상상을 자극받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는 일은 단순히 글을 읽는 일을 뛰어넘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책은 들릴 리가 없는 음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책은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그리게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지금 앉은 자리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상상을 하도록 하는 책이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종종 그런 책을 만나곤 합니다. 우리가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영화를 통해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좀 더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은 눈과 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르가 아닙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사람의 오감을 자극할 수 있어야 비로소 상상을 자극하죠.


 <양과 강철의 숲>은 책을 읽다 보면 정말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이 떠오르는 책입니다. 이 책은 피아노 조율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주인공 도무라가 피아노 조율을 배워가며 자신의 소리에 도달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본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유명한 하라 다마키의 말 중 하나인데, <양과 강철의 숲> 소설이 바로 그 문체입니다.


 피아노 조율을 하면서 도무라는 바로 그러한 소리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피아노 조율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 또한 조율사 이타도리 소이치로 씨가 조율한 소리를 듣고, 눈 앞에 펼쳐진 전혀 다른 풍경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죠. 그 장면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크고 새까만 피아노가 있었다. 크고 새까만 피아노였을 것이다. 피아노 뚜껑은 열려 있었고 그 옆에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그 사람이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피아노 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뚜껑이 열린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 밤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본문 8)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지만, 보는 것만으로 기품이 느껴지는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대 위에서 울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 소리를 책의 저자처럼 표현할 수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소리 없는 감탄이 나왔죠.



 이후 저는 책을 읽으면서 책에 적힌 문장 하나하나에 빠져들었고, 무엇보다 책의 소재와 이야기가 피아노와 피아노 조율을 하는 이야기라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피아노 조율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술도 묘사가 되지만, 책은 구체적인 기술보다 감성적인 기술을 표현하는 데에 조금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양과 강철의 숲>에서 도무라가 본격적으로 피아노 소리에 자신만의 색을 더해 가장 이상적인 소리를 추구하는 계기는 '유니'와 '가즈네'라는 쌍둥이 자매의 피아노를 듣고 난 이후입니다. 두 소녀의 피아노는 대조적이면서도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가즈네의 소리는 아주 남달랐습니다.


 작가는 쌍둥이 언니인 가즈네의 첫 피아노 연주를 도무라의 시선을 통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른손과 왼손이 움직이는 짧은 곡이었다. 아마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습곡일 것이다. 아름다웠다. 알알이 고르고 단정하고 윤기가 흘렀다. 귀에 돋은 닭살이 사라지지 않았다. 연주가 순식간에 끝나서 안타까웠다. (본문 31)


 선배 조율사와 함께 쌍둥이 자매의 조율을 한 이후 도무라는 한 번 더 그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때 혼자서 피아노를 조율하게 되지만, 완성도는 두 자매가 원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매들은 그 소리 또한 아주 우아한 소리이고,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하면 됐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겪은 이후 도무라는 좀 더 피아노 조율을 깊이 마주하게 되는데, 그가 한 청년의 피아노를 조율한 이후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는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청년은 피아노 앞에 서서 한 손가락으로 도를 친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 도만으로는 조율 상태를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가능하면 조금 더 쳐보라고 말을 걸려고 했을 때,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얼굴에 놀란 표정이 선명했다. 그의 눈이 딱 한 번 내 눈과 마주치고 다시 비껴갔다. 그는 검지를 엄지로 바꿔 다시 한 번 도를 쳤다. 이러서 레, 미, 파, 솔을 쳤다. 왼손을 몸 뒤로 허우적거리며 의자를 찾았다. 의자에 손끝이 닿자 피아노를 보고 선 채, 왼손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양손으로 도부터 한 음씩 차분하게 1옥타브를 올렸다.

청년이 의자에 앉아 어깨 너머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떠십니까?"

물을 것도 없었다. 웃고 있었다. 청년이 웃고 있었다. 마치 그 사진 속의 소년처럼. 다행이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가 자신의 피아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중략) 속도가 너무 느려서 몰랐는데 쇼팽의 <강아지 왈츠>였다. … (중략) … 속도는 느리고 소리 하나하나가 모이지 않았지만 청년이 어린아이처럼 혹은 강아지처럼 잔뜩 신이 나서 연주하고 있다는 감각이 전해졌다. 때때로 건반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뭔가 흥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본문 165)


 글을 읽는 동안 지금 도무라와 청년이 서 있는 곳, 그리고 앞에 놓여있는 피아노가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나요? 쇼팽의 <강아지 왈츠>를 아시는 분은 자신이 들었던 쇼팽의 곡을 떠올리면서 어떤 이미지를 좀 더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리와 그림. 정말 멋지지 않나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사람의 마음 깊숙이 들어와 작품 세계에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책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양과 강철의 숲>은 피아노를 배우는 제가 미처 만나지 못했던 피아노 조율에 대한 이야기, 제가 아직은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있는 소리를 만드는 피아노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느리게 시작해서 중반부터 데굴데굴 밝은 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경쾌해지는 곡이었다. 소리가 쭉쭉 뻗는다. 불협화음도 없다. 몇 가지 음이 섞였을 때도 균형이 잘 잡혔다. (본문 257)


 뒤늦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지만, 아직 너무 서툴러서 제대로 된 소리를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악보를 있는 그대로 연주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연습 시간도 적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건 노력이라는 말보다 진지함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어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가즈네는 무언가를 꾹 참고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노력한다는 생각도 없이 노력하고 있기에 의미가 있다. 노력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노력은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어서 소심하게 끝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 노력하고 그 대가를 회수하려고 하다 보니 그저 노력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그 노력을 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게 되면 상상을 뛰어넘는 가능성이 펼쳐진다.

가즈네는 부러울 만큼 고결한 정신으로 피아노를 마주한다. 피아노를 마주하는 동시에 이 세상과 마주한다. (본문 220)


 가즈네가 피아노를 마주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피아노를, 어떤 마음으로 오늘 이렇게 글을 쓰는 걸까?'는 질문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양과 강철의 숲>을 통해 만난 너무나 매력적인 문체가 바로 제가 원하는 이상적인 연주이자 글이 아닐까요? (웃음)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분께 이 소설 <양과 강철의 숲>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피아노 조율을 완성하는 도무라가 만드는 그 소리를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러한 글을 쓰게 되는 그 날까지 더 진지하게 세상과 마주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글을 마치면서 제가 너무나 반해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의 최종 목표가 된 이 곡을 들으면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쇼팽 에튀드 OP 25-11 Winter Wind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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