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인문학, 오늘날 우리에게 인문학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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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그냥 읽고 트렌드에 따라가는 유행이 아니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인문학'이라는 단어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낯설었지만,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통해서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정의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질문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던 풍토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마이클 샌델 열풍 이후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질문하는 가치를 알게 되었고, 그 질문은 곧 인문학에 대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지대넓얕>으로 줄여서 불린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그동안 우리가 어렵게 생각한 '인문학'이라는 광활한 지식의 바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해주었다. <지대넓얕>은 그야말로 교과서 밖 지식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었다. 어려운 인문학을 굳이 어렵게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한국 사회는 긴 시간 동안 '왜?'라는 질문 없이 누군가가 제시한 답안을 따르며 지내왔다. 그 탓에 획일화되어버린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공감하지 못하거나 비윤리적이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가치관이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학교 폭력, 묻지 마 살인 등이 그 사례다.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왜?'라는 질문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작정 일을 하더라도 박탈감에 시달리는 나를 채우기 위해서 '왜?'라는 질문이 필요했고, 나 자신의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를 아는 일'이 필요했다. 그 일을 지금 인문학이 하고 있다.



 <치유의 인문학>. 이번에 읽은 인문학의 다양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책의 제목이다. <치유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은 마치 우리에게 인문학이 상처 입은 우리의 지식을 치유해주는 느낌으로서 접근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면 획일적으로 쌓인 지식에 대한 치유가 아니었다.


 <치유의 인문학>은 11명의 인문학자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고민'에 대해 말하고, '힐링'이라는 단어가 붙어 상업적으로 변질한 듯한 인문학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어떤 고전 지식을 쉽게 풀어서 말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과제를 말한다.


 책을 펼쳐서 읽어보면 제일 먼저 진중권 교수의 글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저는 '멘토'라는 말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힐링이란 말이 너무 보편화된 것처럼 멘토라는 말도 지나치게 보편화된 듯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저한테 누가 메일을 보내 "저에겐 당신이 롤모델입니다"라고 하면, 저는 "절대로 나처럼 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고유하여 자기만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멘토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제가 멘토링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한정돼 있습니다. 제가 전공한 미학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멘토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석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그에게 먼저 어떤 책을 보고, 그 분야에서 저명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 먼저 어떤 책을 읽어보라고 말해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얘기되는 '멘토'는 그런 멘토가 아니라 '인생의 멘토'로서, 남에게 인생관을 가르쳐주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람마다 처한 조건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삶의 경험이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데, 어떻게 인생 자체에 대해 보편적 멘토링이 가능하겠습니까.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본문 42)


 <비정상회담>과 뉴스를 통해서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를 몇 번 접한 적이 있는데, 그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멘토, 멘토' 하면서 참고할 수 있는 삶의 롤모델을 찾으려고 하지만, 어쩌면 그 일 또한 '왜?'라는 질문 없이 오로지 '정답' 하나를 찾기 위한 일의 되풀이가 아닐까?


 개인의 삶의 길을 제시해주는 일은 타인이 해줄 수는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왜 해온 거지?'라는 질문을 자기에게 던져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책을 읽는 일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의 본질적인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답 사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는 인문학을 통해서도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속 시원한 답을 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청춘 멘토라는 말에 여전히 따라다니고, 자신이 직접 답을 구해야 하는 질문을 성공한 타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질문하는 건지도 모른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낯선 학문이 되지 않고,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왜?'라는 질문의 가치를 일깨워준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문학을 만나면서 질문을 하되, 답을 스스로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또 다른 '왜?'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 질문이 힘겨워서 '왜?'라는 질문을 잠시 뒤로 미룰 수 있고, 타인에게 잠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내가 가진 '왜?'라는 질문을 타인이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국, 인문학이라는 건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사건을 통해서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한다. 인문학을 통해서 깊은 사색을 해보기 아주 좋은 시기다. 스펙 사회와 불평등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늘 우리 앞에는 그 질문이 놓여있다.


 <치유의 인문학>은 인문학을 통해 현대인에게 치유라는 공감을 건네는 책이 아니다. 치유라는 단어를 통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인문학에서 벗어나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해보아야 할지 과제를 던지는 책이다. 부디 책을 통해서 상업적 인문학에서 벗어나 '진짜 질문'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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