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감하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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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사회에서 윤리적 이해를 만들 수 있는 건 바로 공감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등이 빠르게 공급되면서 사람들은 타인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면서 대화를 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서로 손뼉을 치면서 함께 즐거워하던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고, 이제 사람들은 그렇게 손뼉을 마주치는 것보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트위터에서 '리트윗'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는 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다수가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즘 사람은 감정이 메말랐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아직 우리가 정말 '공감하는 능력'을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고 말하기는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모세대가 몰려온다》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스마트 기기에 익숙한 10대는 모바일 세계에서 그 공감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고 해서 우리는 '뭐야, 그러면 다행이네.'이라고 생각할 것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감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히 늘어나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른 말로 '소시오패스'라고 그런 말을 하는데, 온라인에서 타인을 악의적으로 괴롭히는 사람들은 '공감하는 능력'을 잊어버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또한, 요즘처럼 정부가 계속 허공을 향해 헛발질하고 있음에도, 좀처럼 그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이 많은 건 '문제의 근본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음, 어떤 사람은 이 현상을 가리켜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그렇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정치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정치 이야기냐?"라고 심드렁하게 반응하지 말자. 내가 정치와 사회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건, 결국 사람의 행동과 편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아픔에 동정하지만, '힘들겠다' 하고 생각하는 게 전부다. 정말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얼마나 그 일이 힘겨운지 알지 못한다. 공감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래서 윤 일병 사건의 가해자 판결에 대해 옹호하는 사람이 있고, 박근혜 정부가 내놓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고, 이명박 정부가 저질러놓은 4대강 사업과 각종 부자를 위한 정책을 지지하는 서민이 있는 거다. 이는 권위에의 복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조금만 상황이 달라지면, 우리는 이런 상황을 확실하게 고칠 수 있다.


권위에의 복종이 그저 인간의 본성에 각인된 내면적 특징이기보다는 맥락과 문화에 고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밀그램 자신도 이렇게 믿었다. "이 세기의 사회심리학은 중요한 교훈을 알려준다. 어떤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어떤 인간인가?'보다는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잇는가?'일 때가 더 많다."

한편으로, 우리는 권위에 복종하려는 성향이 우리 대부분의 내면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교사들에게서 배우고 성장하는 동안 복종의 문화를 서서히 흡수해 왔으며 직장에서든 축구 경기장에서든 '법률에 복종'해야 하고, '규칙을 따라야 하고', '처신'을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또 권위에 대한 복종을 너무 쉽게 내면화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본능을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필요하다면 기꺼이 권위에 저항하려는 욕구가 있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p94)


 점점 수동적인 기계로만 아이들을 교육하려고 하는 우리 한국에서 '공감하는 능력'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건 바로 이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어른이 아침 9시 등교와 무상급식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는데, 애초에 이게 논란거리가 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왜 어른의 욕심대로 하려고 한다는 말인가?


 물론, 어른들이 말하는 '아이들이 수능 시험을 치는 데에 시간 적응이 힘들 수 있다'는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견이 정말 아이의 입장이 되어서 정말 생각해보았는가? 매일 야간 강제 학습과 학원에 다니며 추가적인 수업을 해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복습을 해야 하고,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힘들어하는 아이의 입장이 되어서 말이다.


 일부 사람은 '나도 어릴 때 그랬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나무랄지도 모르지만, '내가 예전에 그랬었다.'는 이유만으로 늘 한 자리에 멈춰있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지금의 10대는 모바일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면서 공감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함께 모여서 행동을 하고 있다. 이건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일이다. 수동적인 인형이 아니라 능동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단계이니까.


공감하는 능력, ⓒ노지


 위에서 볼 수 있는 책은 어쩌면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우리에게 진짜 공감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려줄 수 있는 책 《공감하는 능력》이다. 책의 초반부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가진 유래와 사람들이 어떻게 공감하는지를 이야기해 다소 지루한 부분도 있지만, 뒤로 갈수록 우리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공감 사례로 책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가 편견으로 만든 왜곡 렌즈를 쓰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조금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과 공감이 가지는 큰 힘이 정말 한 사람의 인생, 아니,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나치 시대에 일어났던 일, 미국 노예제도 해방에 관련해 일어났던 일, 인종 차별의 일, 노동자들의 고통 등 다양한 예를 읽어볼 수 있었다.


쉰들러가 자기 재산을 써가면서 명단에 있던 사람들을 구해 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그는 체포되어 처형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크라코프 게토에 있던 유대인 가족들을 도왔을까? 그의 행동에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동기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쉰들러의 유대인 가운데 한 생존자는 말했다. 다른 수많은 홀로코스트 구원자들처럼 그도 종교적인 이유가 있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쉰들러는 그의 아버지처럼 무심한 카톨릭 신자였다.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가 한 대답에 핵심 동기가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위해 일하던 사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이 아는 사람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

거짓말처럼 간단한 핵심 동기가 거기 있다. 사람을 안다는 것! 쉰들러에 따르면, 공감 행위는 눈을 바로 바라보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고, 그들의 인격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물리치고 그들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을 폄하하라고 지시하는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 개인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의 위력은 더 넓은 범위의 인간들과 공감하기 위한 디딤돌이 된다는 데 있다. 쉰들러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스턴 및 다른 노동자들과 쉰들러의 개인적 관계는 유대인들이 겪는 고난과 더 보편적인 연대를 맺는 데 기여했다. 또 쉰들러는 우리의 공감능력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변하고 발전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도 정상적인 상황에 놓이면 창의적으로 도약하고, 실제 행동에 나서도록 고취될 수 있다.

…(중략)…오스카 쉰들러는 예외적인 시기에 살았던 예외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더 적절하다. 유럽 전역에 걸쳐 우파 포퓰리즘이 부흥해 반유대주의의 오래된 유령과 집시 및 무슬림 차별을 불러내고 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발흥과 공공 복지업무의 쇠퇴로 인해 무관심의 문화는 19세기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그리하여 아동빈곤 등의 사회적 비극에 사람들은 갈수록 둔감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기만 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오스카 쉰들러는 숱한 결점을 지닌 모순투성이였지만 구경꾼은 아니였다. (p104)


 위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가진 힘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나 뉴스에서 읽는 여러 기사를 통해 '힘들겠다', '아프겠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이 정부는 미쳤어!', '나라면 절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거야.' 등의 말을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게 될 것인지는 그 상황에 직접 놓여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가 시내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음식을 먹다 말고 창밖을 바라보던 한 친구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저렇게 높은 빌딩들은 도대체 누구 거야? 변변한 내 집 하나 없는 사람은 기죽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우리 같은 월급쟁이는 만날 이 판이니 말이야. 세상이 너무 불공평해"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가 다시 말했다.

"만약 내가 저런 빌딩을 가진 부자라면, 난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을 거야. 가난한 사람들 도우면서 편하게 살면 좋잖아. 가만히 보면,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서워. 안 그런가?"

"자네 말이 맞아. 늘 없는 사람들만 힘들지."

친구도 맥 풀린 얼굴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때 한 여인이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왔다. 등 뒤에 아이가 여뀌꽃처럼 가느다란 팔을 저어 대고 있었다.

아이 엄마의 야윈 손에는 빨간색, 노란색, 연두색 껌들이 무지개처럼 걸려 있었다. 아이 엄마는 두 친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저기…… 껌 한 통만 사주세요."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은 시큰둥해졌다. 가난을 불평하던 친구는 양복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저도 껌 있거든요."

사내는 껌까지 꺼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인은 무안한 듯 웃으며 다른 테이블로 총총히 걸어갔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다. (p118, 연탄길)



《공감하는 능력》이라는 책에서는 그런 상황에 직접 자신을 노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이 가진 힘을 알 수 있고, 후반부에서는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방법 등을 읽어볼 수 있다. 비록 초반부는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책을 읽는다면 어느 순간에 책에 몰입하는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막 같은 사회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모난 돌이 되기보다 그저 튀지 않는 돌이 되기를 강요한다. 진실을 바라보는 것보다 보기 편한 거짓을 바로 보는 것을 선호하고, 공감을 잃어버린 채 그냥 건조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을 접한다. 그래서 정부가 뒷걸음질 치고 있음에도 위기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사회를 바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이다. 그 통찰력은 단순히 지식을 늘인다고 갖춰지는 것이 아니다. 약자의 시선에서 그들이 겪는 삶을 공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게 통찰력이다. 이 책 《공감하는 능력》이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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