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은 정의가 아니라 오직 이익으로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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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에 분노하더라도 시민은 정의가 아니라 오직 이익으로만 움직인다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줬던 세월호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듣기 지겨운 사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의 뒤를 이어 최근에 알려진 28사단 집단 고문·폭행 살인 사건이 많은 사람에게 '저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탈을 쓴 괴물이다.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라는 공분을 이끌어내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사건이 바뀌는 건 절대 그 사건이 잘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건이 가지고 있던 특색에 대해 인색해졌기 때문이고, 지금 당장 나와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그 한순간에만 함께 화를 낸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화를 냈으면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했는지, 그 뒤에 사후 처리에 대한 관심을 잘 두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사건이 '지금 내가 사는 삶의 이익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기업의 검은돈으로 부정을 눈감아주고 있던 정부 관리의 처리와 함께 진상 규명과 부실 대응에 대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이 특별법 논란에서 본 여당과 야당의 대결과 세월호 보상금에 대한 논쟁만 바라봤다. 그리고 그냥 끝나버렸다.


 세월호 유가족은 속이 타들 어가고 있겠지만, 세월호 유가족이 난 대다수 사람에게 세월호 사건은 참사이기도 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딱히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거나 제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내게 큰 이익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냥 속 시원하게 한 번 대한민국을 향해 욕한 것으로 만족해버린다.


 내가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 사람은 대체로 언제나 어떤 일이 내 이익과 관련이 있을 때에만 움직인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이 공분하며 '정의를 살려야 한다'고 외쳤지만, 결국 그 정의는 먹고 사는 게 바쁜 우리에게 잊히고 있다. 속된 말로, '정의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정의를 외쳐서 뭐하겠느냐? 나 하나 잘 살면 된다.'는 방식이 작용하는 거다.


ⓒ구글 검색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정의는 밥을 먹여주지 않지만, 이익은 많은 것을 우리가 손에 넣게 해준다. 하루 세 번 맛있는 식사로 배를 채울 수 있으며, 대학등록금도 해결할 수 있고, 부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내 집 마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여자도 안을 수 있고… 등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걱정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사람이 '이익'을 보고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종종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집에 있는 컴퓨터에 야동이 깔리지 않은 컴퓨터는 없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마음에 사리사욕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개인은 모두 도덕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고, 언제나 사회적 문제에 공분하지만… 결국 그 문제가 지금 당장 내 이익과 관련이 없는 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글쎄, 내 이야기는 지금도 세월호의 진상 규명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찌 동전의 한 면만을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게 당연한 일이고, 그림자가 있으면 빛이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게 우리가 사는 사회의 본질이다.


 누군가는 사람을 너무 비인간적으로 판단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과연 자신은 어떤 일을 선택하는 데에서 정말 이익보다 정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말이다. 아마 웬만큼 올곧은 마음을 가지지 않은 이상, 이익보다 정의를 앞에 둔 선택을 하지 못했을 거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일보다 먼 훗날의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오면… 지금의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드라마 《추적자》에서 김상중이 말한 "사람은 선택의 순간이 와야 비로소 그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거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대사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인 거다.



 그래서 나는 '시민은 정의가 아니라 오직 이익으로만 움직인다'고 말하고 싶다. 가깝게 이번 7월 30일에 있었던 재보궐 선거 결과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기반으로 이익을 내주겠다고 말하지 않은 채, 지겹도록 세월호와 정권 심판만 가지고 떠드는 야당에 신물이 났기에 그들을 선택하지 않은 거다. 사람들에게는 나와 먼 정의보다 가까운 이익이 더 중요하니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저건 정의롭지 못하다! 바꿔야 한다!'고 겉으로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도 똑같이 주장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반대의 선택이 자신의 이익과 연결되기에 주장할 수도 있고, 겉으로 하는 주장과 속으로 하는 주장이 다를 수도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람이 바뀌기를 변하고, 사람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란다면… 분명하게 수치화할 수 있는 '이익'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손에 들어오는 이익이 없는 한―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냉담한 패배주의는 이미 어릴 때부터 우리가 '남만큼만 살면 된다'는 가치관으로 형성되어왔으니까.


 연예인 성추행 사건과 열애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건 단순히 흥미롭기 때문이고, 정치 사건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단순히 흥미롭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전자에는 이익이 없더라도 흥미가 생기지만, 후자에는 이익도 없고 흥미도 없기 때문이다. 흥미는 이익으로 계산될 수 있다. 그런 이익을 통한 흥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익이 움직이는 반값등록금 사건에도 젊은 세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건 바로 지금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 세상을 좀 더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여전히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기득권의 영향을 강력하고, 잘못을 고쳐야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패배주의 속에 있는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서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함께 고민해보자. 시민은 정의가 아니라 오직 이익으로만 움직인다. 그런 시민에게 정의를 말하고,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우리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를 포기해버린다면 지금 서 있는 작은 정의조차 무의미해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작은 정의가 살아 있어 지금껏 유지되어왔음을 명심해야 한다. 선택에 정의와 악은 없다. 오직 '이익이 되느냐 마느냐'는 계산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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